고대 중서아시아 전투를 쓰기 위해 여러 책을 뒤적이면서 느낀 것은 현재 우리나라는 페르시아어, 아르메니아어, 아랍어 등을 아는 사람들이 부족하고 중서 아시아 지역에 나온 역사서 및 문학서에 관한 번역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영어에 의존하여 책과 인터넷을 통하여 여러 중요한 전투에 관한 기록을 구하였는데 자료가 부족해 아쉬움이 많았다. 거의 모든 중요 전투는 영어로 기록되어 영어권 시각으로 쓰여 있음을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예를 들어 「100 decisive battle from ancient times to present」 그리고 「fifteen decisive battles of the world」 등은 영어권에서 본 세계 주요 전투를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고대 중서아시아는 동양이나 서양 보다 문화가 앞섰고 동서양이 교류하는 중앙에 위치하여 여러 중요한 전투가 많이 있었다. 특히 키루스 대제는 처음으로 유럽과 아시아를 덮는 지역을 점령하여 대 제국을 건설하면서 그 이전까지 전쟁에 패하면 패한 민족은 노예로 팔려나갔으나, 키루스 대제는 피 정복지역 주민들에게 자유를 주고 그들의 신앙도 보장해 주었다. 그의 아들 캄비세스는 이집트를 정복하여 세계 최초로 세 개 대륙을 지배하는 제국을 건설하였으며, 세계 최초로 왕중왕(Sha ham Sha)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었다.
알렉산더 대왕은 키루스 대왕의 영향을 받아서 동방원정을 했다. 소크라테스 제자 크세노폰은 「키루스의 교육」이라는 책을 내어 키루스를 그리스에 소개했다. 한니발을 무찌른 로마 공화국의 스키피오는 키루스 대제를 가장 존경했고 그를 본받아 적에게 관대하여 적을 포용할 수 있었다.
중요 전투도 동양이나 서양보다도 다양하고 더구나 종교적 의미의 전쟁이 많았다. 메기도 전투는 인류 최초로 기록을 남긴 전투이고, 최초 유일신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기독교의 비잔틴국과 조르아스타교의 사산조 페르시아 간에 전투가 발생했으며, 까데시아 전투는 이슬람 제국이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뒤 조르아스타교의 몰락을 시키는 결적정인 계기가 되었다.
이슬람 세력과 기독교를 믿는 비잔틴 제국간의 전투가 야르무크에서 벌어져 이슬람 제국의 승리로 끝났다. 이후 비잔틴 제국은 몰락의 길을 걸어야 했다. 달라스 전투는 동양과 서양이 만난 결정적인 전투로써 종이를 서양에 전파한 중요하고도 획기적인 전투였으나 국왕이 참여하지 않아서 기록이 미미한 전투로 남아있다.
배속에서부터 왕으로 등극한 사산조 페르시아의 사푸르 1세는 비잔틴 황제 발레리아루스를 포로로 잡고 페르시아 기반을 튼튼히 했다. 사랑하는 애인을 두고 망명을 해야 했던 호스로우 2세는 비잔틴제국의 황제의 도움으로 왕위를 찾고 영토를 확장하고 옛 애인을 찾았으나, 결국 헤라클레우스 비잔틴 황제에 패해 몰락했고 헤라클레우스 역시 이슬람군에 패하여 그의 승리는 빛바래고 말았다.
단다나칸 전투는 사막 지역을 잘 활용한 셀주크 투르크족이 국가를 건설하게 된 중요한 전투이면서 아나톨리아 고원으로 진출하여 만지게르트 전투에서 승리하여 유럽 측에서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을 제공했었다. 십자군 전쟁은 이후 이슬람 세력에 대항하는 기독교 세력의 결집을 노리는 수단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약탈을 노리는 전투로 변질되었다. 더구나 기독교도들은 이교도들은 죽여도 마땅하다는 논리를 전개하여 많은 살육과 파괴를 자행했다. 하지만 십자군 전쟁에서 신만 믿고 전투해서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터득하고 무기와 전술개발에 박차를 가하여 유럽 발전의 계기(契機)가 되었다.
신흥 세력 이슬람군은 사산조 페르시아와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전술을 터득하여 이들 국가들을 패망시켰다. 전투를 하는 가운데 이슬람 국가도 믿음만으로는 적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터득하고 전술과 무기개발에 힘썼다. 이슬람 제국 초기 칼리프 시대는 신앙으로 뭉쳐서 상승효과를 얻었으나 차츰 신앙심이 흐려져서 집단 감정이 소원해짐에 따라 쉽게 이슬람 국가들이 멸망하곤 했다
제베와 수부타이의 스텝 전술은 당시 당할 세력이 없었고 특히 수부타이는 무패의 장군으로 이름을 남겼다. 티무르는 적의 일부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여서 적을 격파하는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였다. 몽골 세력의 서진을 막은 아인 잘루트 전투는 몽골군의 한계였는가 아니면 몽골군이 이집트에 대해 관심이 없어서 더 나아가지 않았는가를 의심케 하는 부분이다. 러시아 국민정신을 고양하고 성장의 동기를 부여한 콜리코보 전투는 최초로 러시아인들이 동맹하여 몽골군을 격파한 전투로 러시아인들은 러시아 3대 전투 중에 하나로 꼽고 있다.
가즈니Gazni 왕조의 마흐무드Mahmud는 26년 동안 북인도를 17번 이상 침입해 약탈전인지 아니면 이슬람을 전파하기 위함인지 의심케 하고 있다. 이 와중에 최후의 힌두국 왕 프리트위라즈 3세의 사랑과 슬픈 사연이 시인들에 의해 회자(膾炙)되고 있다.
무굴 제국을 세운 바부르는 글을 좋아하는 아들 후마윤에게 평소 “붓이 아니라 검으로 나라를 다스린다고 말했다.” 후마윤은 전투하다가 패하여 나라를 잃었으나 무력으로 다시 나라를 찾았다. 그의 아들 악바르는 13세 때 왕위에 올라 전투에서 완전히 패하는 순간에 적의 왕이 화살에 맞아 전사하는 바람에 기사회생하였으며, 무굴 제국의 영토를 최대로 넓혔다.
비잔틴 제국이 서기 380년에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고, 서기 632년 예언자 무하마드가 사망한 후 이슬람교를 전파하려는 이슬람 제국 세력을 확장하려 함으로써 고대 중서아시아 전쟁은 종교 전쟁 형태를 띠게 되었고 전쟁에서 죽으면 순교하여 천국 간다고 생각하여 전쟁은 더욱 격렬해졌다. 그러나 기간이 갈수록 종교적이기 보다는 재물을 약탈하려는 목적이 더 강해졌다. 몰타 포위전은 이슬람의 세력의 한계를 들어 낸 전투였고 레판토 전투는 이슬람 세력 몰락의 시발점이었다.
유일신 신도들은 전투를 통하여 신들이 언제나 자기들 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특히 유럽인들은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개개인은 천부의 인권을 받았다고 믿고 인간의 기본권과 개인의 자유를 중요시했다. 그들은 개개인의 소질을 개발함에 따라서 인간은 가톨릭 체제의 억압에서 탈피하여 자연과학 연구에 치중하게 되었고 무기와 전술 개발을 선도하여 지리상 발견과 더불어 식민지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동양의 여러 나라들은 구태의연한 종교 사상에 안주하여 낙후하고 말았다.
독자들은 본 책자를 읽으면서 몽골군이 몽골 전술만을 사용한 것이 아니고 반드시 현지 과학기술을 채택하여 전술 발전에 획기적인 변화를 하였음을 주지해야 한다. 또한 이슬람 국가도 선진 페르시아와 비잔틴과 대결하면서 그들의 우수한 무기와 전술 수용하여 발전시킨 반면에 페르시아와 비잔틴은 구태의연한 방식을 고수하다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 이후 유럽은 인간을 구속하는 가톨릭체제를 벗어나 개개인의 인권을 존중하고 자연을 연구하고 개발한 결과임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본 책자를 발간 해준 도서출판 두남의 전두표 사장에게 심심한 사의를 표하고 본 책을 열심히 교정해 준 사랑하는 아내(송경애)에게 이 책을 바친다.